글
미술 잡지사의 기자로 일하던 시절, 내가 쓴 기사의 대부분은 미술품 '가격'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특별했다. 그 잡지가 미술품 가격을 전면에 내세운 국내 유일한 매체라는 점이 내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그런 내가 미술 '비평'보다 '가격'과 관련된 기사를 주로 쓴다는 건 당연했다. 미술품 가격과 엮인 국내외 미술 시장, 수집가, 컬렉션 등등. 이런 이슈들이 내 기사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기사를 쓰면 쓸수록, 점점, 차차, 더욱, 미술품이 '돌'로 보였다. '돈'이 아닌 '돌'로.
"미술관을 방문해서 작품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느끼기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내가 더 이상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식안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돈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라는 말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37쪽)
▲ <나는 앤디 워홀을 너무 빨리 팔았다>(리처드 폴스키 지음, 배은경 옮김, 아트북스 펴냄). ⓒ아트북스 |
제목대로 책의 중심축은 앤디 워홀 작품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고생해서 찾아낸 워홀의 <깜짝 가발> 작품을 '뭐에 홀린 듯' 경매에서 팔아 버린다. 그 이후, 앤디 로즈라는 수집가가 저자에게 워홀의 <깜짝 가발>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저자는 이를 위해 미술계를 오랜 시간 수색한다. 그 과정이 책의 큰 줄기다. 그 과정에서 '재미'에 '쓸모'까지 갖춘 미술계의 비화(祕話)들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이게 모두 깨알 같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저자는 1993년 런던의 한 갤러리에 갔다가, 스폿페인팅(Spot Painting, 흰 바탕에 추파춥스 사탕 같은 알록달록 땡땡이를 상상하면 된다) 전시를 준비하는 데이미언 허스트를 만난다. 허스트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이 직접 그리지 않고, 조수들을 고용해 '허스트 표' 그림을 그리도록 공공연히 시키고 있었다(터너 상을 받기 전이다.) 저자는 직접 그리지 않고 '미술 감독' 행세를 하는 허스트를 보며, "말도 안 돼. 저 남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야"(133쪽) 라고 중얼댄다. 지금의 허스트는 마치 할리우드 스타 같아서, '유명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인데 말이다.
또한 미남자(저자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외모'를 꼽을 정도로)로 유명한 에드 루샤의 작품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던 저자의 이야기 역시 씁쓸하지만 흥미롭다. 런던의 한 갤러리에 가서 미술상인 자신을 소개하고, 전시 중이던 루샤의 그림을 거래할 수 있는지 논의하려 하지만 갤러리는 무례하리만치 냉랭하게 답한다.
"우리는 미술상이나 미국인에게는 작품을 팔 생각이 없어요. 작가가 우리에게 이 작품을 위탁하면서 그것들을 모두 유럽의 주요 수집가와 미술관에 팔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220쪽)
저자는 알고 있었다. 이 갤러리가 미국인에게도 루샤의 그림을 판다는 것을. 다만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것을. 책에는 그런 '거절'이 보편화 된 갤러리들, 미술상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서로 차별하고 서로 헐뜯는.
저자는 "미술계에는 확실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110쪽)라는 말을 비롯해, "사실은 갤러리 활동의 90퍼센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세이다"(73쪽), "미술업계에는 전통적인 직무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부산을 떨어야 한다"(74쪽) 등 자신의 '일터(미술업계)'에 대해 거침없이 말한다.
거침없음, 바로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이다. 신비주의로 일관된 미술계를 여과 없이 묘사하고, 돈의 노예처럼 구는 사람들을 마구 비난한다는 점. 그렇지만 직업이 미술상인 저자가 미술과 돈을 결부하지 않는다고? 결국, '미술을 미술로 만드는 것은 돈뿐'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거 아닐까?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은, 결코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 있다.
"로는 30년 이상 꾸준하게 전시회를 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들은 생애 첫 전시회를 여는 화제의 신진 화가의 그림에 비해 그다지 비싸지 않다. 로는 뛰어난 화가이지만 그것은 작품 가격과 관계가 없다." (202쪽)
저자는 '데이비드 로'라는 중견 작가가,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위치 지워지는지 한 장(14장)에 걸쳐 자세히 설명한다. '데이비드 로'라는 특정 작가를 설정해 두고 있지만,일반적인 중견 작가들의 숙명적 고충을 안타까워한다. 많지 않은 작품 판매 수입과는 별개로, 인정받아 마땅한 그들의 헌신과 노력을 격려한다.
또한 저자는 어느 날 폭풍이 가득 담긴 창문 밖 풍경을 내다보다가, '빌 앤턴'이라는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소박한 그림 <메사에 내리는 비>가 떠올랐던 황홀한 경험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나는 충격을 주는 그림을 만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단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며 그 후에도 그것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항상 수집가들에게 조언한다. 위대한 그림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325쪽)라고 미술다운 미술을, 돈이 아닌 무형의 '그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
이 책의 세 번째 장점은,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돈벌이'로만 국한되는 일반적 편견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당연히 '돈벌이'만을 위해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특히 미술 시장이 뜨거울 때(이럴 때는 연일 신문에서, 미술품투자가 몇 배의 수익을 남겼고, 하는 식의 기사가 넘쳐난다)는 엄청나게 많다. 단순히 미술 시장이 핑크빛이라는 기사만을 얕게 접하고, 그림 한 번 사볼까, 싶어 뛰어드는 사람들 말이다.
허나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품을 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푼 기대만큼 수익을 얻지 못했다. 그건 미술 시장에 광풍이 불 때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투자도 그렇겠지만 특히나 미술품은 그 특성상 단기간에 수익을 올릴 수가 없다. (이 책에 단 30일 만에 네 배의 수익을 올린 사례가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건 '수십억분의 일'의 확률이다. 선례가 될 수 없다.) 미술품은 주식도, 부동산도 아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쉽다는 말이 아니라, 미술품은 앞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짜증이 날만큼(돈이라는 척도로만 본다면) 모호한 대상이라는 뜻이다. 미술은 수치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데이터나 논리가 1퍼센트라면, 직관과 운이 99퍼센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책에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펀 우드'같은 미술 투자사(19장)는 거의 다 실패한다. 이에 반해, 저자에게 앤디 워홀의 <깜짝 가발>을 구해 달라고 했던 앤디 로즈와 같은 개인 수집가들은 많은 경우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건 갖고 싶은 미술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하고, '적당한' 미술품으로 타협하지 않으며, 찾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는 끈기를 갖췄기 때문이다. 물론 가격 흥정을 하고, 향후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고려하긴 하지만 결국 바탕이 되는 것은 원하는 미술품에 대한 '애정'이다. '투자'로만 접근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애정'이 바로 그 '투자'를 돕는 것이다. 저자는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중요한 미술품을 수집하는 일은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우선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 말은 방대한 독서, 그리고 갤러리들과의 관계 형성, 또 각 미술가들의 최고 작품을 보기 위한 미술관 방문 등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예술 작품을 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227쪽)
미술품 투자 지침서쯤으로 생각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책에는 정말 정말로, 거의 접할 수 없는 미술 비즈니스에 관한 뒷얘기(경매 회사가 미술품을 확보하기 위해 쏟아 붓는 돈, 미술상이 수집가에게 미술품 가격을 흥정하는 관행, 갤러리와 작가와의 금전 관계 등)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라고 쓴 건, 2008년 세계 경제가 고꾸라지기 전까지 약 3년간의 미술 시장을 사실적으로 쓴 '논픽션'이기 때문이다(읽다 보면 '픽션'으로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나로서는, 예상과 달리 미술품을 '애정'하게 만드는 섬세한 내용이 많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미술품을 '돌'로 보이게 만들지 않고, 함께 숨 쉬며 살고 싶은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다만 아쉬운 점은 책에 등장하는 미술가와 미술품의 수 대비 사진 도판이 적다는 것인데, 그건 아마도 꽤나 비싼 동시대 미술품의 도판 사용료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래서 옆에 둔 스마트폰으로 이미지를 틈틈 검색하며 책을 읽었는데, 생각보단 안 귀찮았다. 이미지가 아쉽다면, 스마트폰을 활용한 적극적 책읽기를 권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802114222